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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 대학의 설립자, 오쿠마 시게노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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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 대학의 설립자, 오쿠마 시게노부

무자기한 2021. 11. 25. 11:27

오쿠마 시게노부 후작 (大隈重信, 1838년 3월 11일 ~ 1922년 1월 10일)은 일본의 정치가이자 메이지 과두정의 유명한 구성원으로 1898년부터 1914년 사이에 일본 제국의 총리를 역임했으며 서양 과학의 초기 지지자이자 중도주의자로서 와세다 대학을 설립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린 시절

1838년 히젠 국 사가(현재의 사가현)에서 포병 장교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유교 문학과 시골 사무라이가 쓴 하가쿠레를 통해 교육받았지만 1853년 네덜란드 연구 기관으로 옮기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1861년에 네덜란드 학교가 지방 학교와 합병되면서 그곳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즈음, 일본에 도착하기 시작한 유럽인들을 쫓아내는 것을 목표로 한 손노조이 운동에 동조하였지만, 또한 조슈의 반란군과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 사이의 중재를 지지하기도 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나가사키에서 구이도 베르베크라는 네덜란드 선교사를 만나 영어를 배웠고 신약성서와 미국 독립선언서 사본을 그에게서 제공받게 되는데 이 작품들은 그의 정치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기존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입헌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을 지지하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후 나가사키와 교토 사이를 자주 오가며 메이지 유신에 참여하였고, 1867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사임을 권고하였으며 허가 없이 사가 번을 떠나, 쇼군이 거주하던 교토로 갔지만 오쿠마와 그의 일행들은 체포되어 사가로 다시 돌려보내졌고 이후 1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메이지 시대의 정치 인생

1868년 메이지 유신의 보신 전쟁 이후, 메이지 신정권의 외교 담당관으로 임명되었고 이때 영국 외교관 해리 스미스 파크스와 기독교 금지에 대해 협상하고 나가사키에서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박해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고 이후, 1873년이 되어서야 일본 정부는 기독교에 대한 금지를 없애게 되었습니다. 또한 일본의 통화 개혁 프로그램의 수장으로서 추가적인 직위를 부여받았는데 이노우에 카오루와의 긴밀한 접촉을 이용하여 도쿄의 중앙 정부에서 자리를 확보하였고, 1870년 제1회 일본 국회에 선출되었고, 곧 재무대신이 되어 국가의 화폐를 통일하고, 조폐국을 창설하고, 별도의 산업 대신을 만들었지만, 1881년 메이지 과두정치의 사쓰마 가문과 조슈 일당, 특히 이토 히로부미 일당과 외채를 확보하고 헌법을 제정하려는 노력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해임되었다고 전해집니다. 1882년, 입헌 진보당을 창당했고, 곧 오자키 유키오, 이누카이 쓰요시 등 여러 지도자들을 끌어들였고, 같은 해 도쿄도 와세다 구에 도쿄 센몬 각코를 설립했는데 이 학교가 이후 와세다 대학으로 개명되었다고 합니다. 1888년 2월, 이토는 다시 그를 외무대신으로 임명하여 서방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에 대한 협상 개정 문제를 다루었지만, 막상 그가 협상한 조약은 대중들에게는 서구 열강에 너무 유화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상당한 논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1889년, 겐요사의 공격을 받았고, 오른쪽 다리는 폭탄에 의해 날아갔으며 당시 정계에서 은퇴했다고 전해졌지만 1896년 게이신토를 진보당으로 재편성하여 정계에 다시 복귀하였다고 합니다. 1897년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그를 외무대신, 농무 대신으로서 2번째 내각에 참여하도록 설득했지만, 그는 사임하기 전까지 1년 동안만 재임했습니다. 1898년 6월, 심포토를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지유토와 합병하여 켄세이토를 창당하였고, 이토 히로부미 총리의 후임으로서 일본 역사상 최초의 당파 내각을 조직하며 총리의 위에 오르긴 했지만, 내부 의견 차이로 무너지기 전까지 겨우 4개월밖에 살아남지 못했다고 하며, 이후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내각을 넘겨준 뒤, 1908년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당수직을 맡았다고 전해집니다. 정계 은퇴 후, 와세다 대학 총장과 일본 문명 학회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당시 일본의 첫 남극 탐험에 대한 지지를 모았습니다.

다이쇼 시대의 정치 인생

1914년 지멘스 스캔들로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이 사임하자 천황의 요청으로 다시 두 번째 일본의 총리로 정계에 복귀하였고, 도시카이 리켄, 주세이카이 조직과 함께 자신의 지지자들을 연립 내각으로 조직하게 되는데 적극적인 대외정책으로 주목받았다고 하며, 그 해 말, 일본은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에 따라 연합국 편에 서서 본격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1915년, 가토 다카아키와 함께 중국에 대한 21개 요구의 초안을 작성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우라 스캔들 이후 내각은 대중의 지지를 잃었고 1915년 10월 총사퇴를 단행하게 되었으며 이후 1916년 겐로와의 오랜 논쟁 끝에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고 전해지며 내각은 이후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같은 해인 1916년 국화 최고 훈장을 수여받았고, 가조쿠 귀족제에서 ‘고샤쿠’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1922년 와세다에서 사망했는데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장례식에 약 30만 명의 인파가 몰렸고 사후에 국가의 최고 영예인 국화 훈장 깃을 수여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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